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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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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바카 칸은 일 칸국의 훌라구의 아들로, 1265년부터 1282년까지 통치했다. 불교 신자였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 칸국의 칸이 되었다. 그는 킵차크 칸국 및 차가타이 칸국과의 전쟁을 벌였으며,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과의 동맹을 모색했다. 십자군과의 협력을 통해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려 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아바카 칸은 과도한 음주로 인해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동생 테쿠데르가 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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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카 칸
기본 정보
칭호일칸 알-무아짬 (최고의 일칸), 술탄-이 이란 (이란의 술탄)
아바카가 그의 하툰과 함께 왕좌에 앉아 있다 (도르지 하툰일 가능성이 있음)
아바카가 그의 하툰과 함께 왕좌에 앉아 있다 (도르지 하툰일 가능성이 있음)
출생일1234년 2월 27일
출생지몽골
사망일1282년 4월 4일
사망지하마단, 일칸국
배우자불루칸 하툰, 파디샤 하툰,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자녀아르군, 게이하투, 올자트, 엘 쿠틀루그 하툰 (딸)
가문보르지긴 가문
아버지훌라구 칸
어머니예순친 하툰
종교불교
통치
작위일칸
재위 기간1265년 2월 8일 – 1282년
이전 통치자훌라구 칸
다음 통치자아흐메드 테쿠데르

2. 생애

아바카 칸의 생애는 일 칸국의 두 번째 칸으로서 몽골 제국 서부 지역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버지 훌라구의 뒤를 이어 칸위에 올랐으며,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맘루크 왕조 등 여러 세력과 군사적, 외교적 관계를 맺었다. 특히 기독교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며 십자군과 협력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발행된 일부 동전에는 기독교 상징과 관련 문구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8] 아바카 칸의 치세는 일 칸국의 정체성 형성과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설정에 중요한 시기였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아바카는 1234년 2월 27일 몽골에서 태어났으며[3], 일 칸국의 창시자인 훌라구의 아들이었다. 그는 불교 신자였으며, 아버지 훌라구의 총애를 받아 투르키스탄의 총독으로 임명되기도 했다.[5]

1253년, 아버지 훌라구가 서방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아바카는 동생 요시무트 등과 함께 이 서방 원정에 참여했다. 1263년 말에는 조치 울루스의 베르케와의 갈등으로 전쟁이 벌어졌고, 노가이가 이끄는 군대가 코카서스 방면에서 침공해왔으나, 훌라구의 군대는 이를 격퇴했다. 아바카는 이 전투의 후속 부대로서 아제르바이잔 지방에 파견되어 다시 침공해 온 노가이 군대를 물리쳤다. 이 시기 훌라구는 자신이 실효 지배하던 여러 지역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통치하게 했는데, 아바카는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 이르는 이라크, 호라산, 마잔다란 지역을 위임받았다.

훌라구는 1265년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 전에 비잔틴 제국 황제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에게 사절을 보내 그의 딸과의 혼인을 추진했다. 미카엘 8세는 자신의 사생아 딸 마리아 팔레올로기나를 1265년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의 수도원장 테오도시우스 드 빌하르두인의 호위를 받아 파견했다.[6] 역사가 스티븐 런시먼에 따르면, 그녀는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에우티미우스와 동행했다고 한다.[5] 그러나 훌라구는 마리아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고, 그녀는 대신 아들인 아바카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바카가 일 칸으로 즉위할 때 그와 결혼했으며, 훌라구의 아내였던 도쿠즈 카툰이 1265년에 사망하자 마리아는 몽골인들 사이에서 '데스피나 카툰'으로 불리며 영적 지도자 역할을 이어받았다.

아버지 훌라구가 사망한 지 4개월 후인 1265년 4월, 아바카는 당시 동생 요시무트가 관할하던 타브리즈로 이동하여 훌라구의 장례를 치렀다. 이후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6월 15일, 서정군의 왕족과 장군들에게 추대되는 형식으로 훌라구의 왕위와 군대를 계승하여 일 칸국의 제2대 칸으로 즉위했다.[5] 그는 즉위 후 몇 달 동안 봉토와 총독직을 재분배했으며[5], 일 칸국의 수도를 몽골인들이 선호하는 북서부 초원지대인 타브리즈로 결정했다.[7] 또한 이란 내 여러 지역은 형제들에게 위임하고, 파르스, 케르만 등지의 쿠르트 왕조, 아르투크 왕조, 카라히타이 왕조와 같은 기존 세력들의 지위는 인정해주었다. 재무는 와지르 샴스 앗딘 주와이니에게, 바그다드 관리는 그의 동생이자 역사가인 아타말리크 주와이니에게 맡기는 등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즉위 직후 외부의 위협에 직면했다. 1266년 7월 초, 노가이가 다시 침공해오자 동생 요시무트를 파견하여 격퇴했다. 이후 베르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쿠라 강을 건너 조지아트빌리시 근교까지 진군했으나, 그곳에서 베르케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조치 울루스 군대는 철수했다. 이로써 북방의 위협은 잠시 안정되었다.

하지만 1269년, 동쪽에서는 차카타이 울루스의 바락이 무바라크 샤에게서 칸의 자리를 빼앗고, 오고타이 울루스의 카이두 및 조치 울루스의 몽케 테무르와 협정을 맺은 뒤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헤라트 근교까지 침공해왔다. 아바카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1270년 7월 21일 카라 수 평원의 전투에서 바락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이 전투 이후 카이두와 협정을 맺고 휴전했다.

아바카 시대에 발행된 일부 동전에는 기독교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아랍어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오직 한 분 하느님"이라는 기독교 비문이 기록되어 있었다.[8]

2. 2. 킵차크 칸국과의 전쟁

아바카 칸의 금 디나르, 이스파한 조폐창. 앞면: . 뒷면:


아바카 칸의 은 '''디르함''', 트빌리시 조폐창에서 주조, 1265년


아버지 훌라구의 통치 이래, 일 칸국의 몽골족은 킵차크 칸국의 몽골족과 전쟁 상태였다. 이는 아바카의 치세에도 이어졌고, 킵차크 칸국은 그가 즉위한 다음 해 봄에 일 칸국을 침략했다. 이러한 침략은 킵차크 칸국과 이집트 맘루크 왕조 간의 동맹의 결과였다. 이러한 동맹의 일환으로 킵차크 칸국은 아바카가 맘루크 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그의 영토를 공격하여 아바카를 방해하려 했다.[5] 이러한 적대 행위는 킵차크 칸국의 칸 베르케가 1267년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칸 쿠빌라이는 내전을 막기 위해 개입하려 했고, 그의 영향으로 킵차크 칸국의 새로운 칸 몽케 테무르는 아바카의 영토를 대대적으로 침략하지 않았다.[9] 그러나 몽케 테무르는 여전히 사령관 노가이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에게 아바카를 공격하고 정복한 영토를 분할하겠다고 약속했다.[10] 하지만 동시에 몽케 테무르는 일 칸국이 차가타이 칸국의 기야스 앗딘 바라크를 격파했을 때 아바카에게 축하 사절을 보냈다.[11] 1270년에는 몽케 테무르가 이란의 작업장에서 세수를 징수하도록 허용했다.[12]

이듬해(1266년) 7월 초순에는 노가이의 거듭된 침공에 대해 요심두를 파견하여 이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는 베르케 자신이 직접 친정을 나섰고, 쿠라 강을 건너기 위해 조지아트빌리시 근교까지 대군을 이끌고 접근했지만, 이 지역에서 베르케가 급사(1267년)하면서, 조치 울루스 군은 철수했다. 북방의 위협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1269년, 동쪽의 차가타이 울루스의 당주위를 무바라크 샤로부터 빼앗은 바락이, 오고타이 울루스의 카이두와 조치 울루스의 몽케 테무르와 협정을 맺고, 그대로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친정을 하여, 헤라트 근교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아바카는 스스로 여러 군대를 이끌고, 1270년 7월 21일에 헤라트 남부의 카라 수 평원의 전투에서 이를 요격하여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 전후로 카이두와 협정을 맺고 휴전했다.

2. 3. 차가타이 칸국과의 전쟁

오고타이의 손자 카이두, 바투의 손자 뭉케-테무르, 그리고 차카타이 칸국의 바라크는 탈라스에서 쿠빌라이 칸과 아바카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카이두를 중앙 아시아의 통치자로 임명했으며, 이는 1268년에 시작되어 세기 말까지 이어진 카이두-쿠빌라이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1269년, 차카타이 칸국의 칸 바라크는 오고타이 울루스의 카이두, 조치 울루스의 몽케 테무르와 맺은 협정에 따라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이란을 침공하여 헤라트 근교까지 진격했다. 1270년 초, 바라크는 헤라트에 있던 아바카를 공격했으나, 아바카는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조지아에서 바라크의 친척인 테구데르를 물리쳤다. 같은 해 1270년 7월 21일, 아바카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헤라트 남부의 카라 수 평원의 전투에서 바라크 군을 크게 격파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 이후 아바카는 카이두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듬해, 아바카는 차가타이 칸국에 군대를 보내 보복 공격을 감행했다. 이 군대는 부하라와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1273년 여름, 아바카는 차가타이 가문과 오고타이 가문의 추가 침공을 우려하여 부하라 주민들을 호라산 지방으로 이주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부하라에 주둔하던 아바카 휘하의 부대가 명령을 어기고 약탈과 살육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바카는 지휘관을 처벌했지만, 이 사건으로 카이두 측으로 망명한 마수드 베크의 마드라사를 포함한 부하라 시가지와 주변 지역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부하라는 7년 동안 사람이 살지 못하는 폐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35]

이 외에도 1280년까지 아바카와 차가타이 귀족의 통제를 받는 카라웅나스 사이에는 작은 규모의 분쟁들이 계속되었다.

2. 4. 맘루크 왕조와의 전쟁 및 십자군과의 관계

아바카는 이슬람 맘루크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서방 세계와의 협력을 모색했던 여러 몽골 통치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267년부터 1268년까지 교황 클레멘스 4세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1268년에는 몽골 사절단을 서유럽에 파견하여 자신의 군대, 서방 세력, 그리고 장인인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 간의 프랑코-몽골 동맹 결성을 시도했다. 로마와 아라곤의 하이메 1세로부터 답신을 받았으나, 이것이 1269년 하이메 1세의 실패한 아크레 원정으로 이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13] 아바카는 아라곤 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아라곤 군대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에 도착하면 자신의 동생 아가이가 합류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또한 잉글랜드에드워드 1세에게도 사절단을 보냈으며,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몽골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 대표단에 포함된 아바카의 비서 리칼두스는 회의에서 아버지 훌레구가 기독교도들에게 보였던 호의를 상기시키고, 아바카가 시리아에서 무슬림 세력을 몰아낼 계획임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낭독했다.[14]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노력과 1276년, 1277년에 유럽으로 보낸 추가 사절단 파견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군사 동맹과 같은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260년, 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는 장인인 아르메니아의 헤툼 1세의 설득에 따라 아바카의 아버지 훌라구 칸 치하에서 자발적으로 몽골의 지배를 받아들였다.[15] 이로써 안티오크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일 칸국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1268년,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가 안티오크를 점령했고[16], 보에몽 6세는 트리폴리마저 잃지 않기 위해 바이바르스와 휴전을 맺어야 했다.[17][18]

안티오크 함락에 대응하여, 잉글랜드에드워드 1세1271년 아크레에 도착하여 새로운 십자군(제9차 십자군)을 이끌었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에드워드는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전 맘루크와 휴전을 맺는 데는 성공했다. 아크레에 도착한 에드워드는 레지날드 로셀, 고드프로이 드 보, 존 파커가 이끄는 사절단을 아바카에게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19] 당시 아바카는 투르케스탄 지역에서의 다른 분쟁에 얽혀 있었지만, 에드워드의 요청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여 아나톨리아 주둔군 중에서 장군 사마가르 휘하의 몽골 기병 1만 명을 시리아로 파견했다. 아바카는 1271년 9월 4일 에드워드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문제를 의논한 후, 우리는 귀하를 돕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이끄는 젬아카르(사마가르)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젬아카르와 관련된 다른 계획을 논의할 때, 적과 교전할 정확한 달과 날짜에 대한 명확한 약속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라고 전했다.[20]

1271년 제9차 십자군 동안 아바카의 장군 사마가르가 이끈 몽골 작전 (빨간색)


사마가르가 이끄는 몽골군은 일부 셀주크 지원군과 함께 알레포 남쪽 지역까지 진격하며 주변을 초토화했다. 병력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이들의 출현은 과거 몽골 장군 키트부카의 침공을 기억하던 무슬림 주민들에게 큰 공포를 안겨주어 카이로까지 피난 행렬이 이어지게 만들었다.[21] 그러나 에드워드 1세의 십자군과 몽골군 사이에 효과적인 연합 작전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별다른 군사적 성과 없이 몽골군은 결국 유프라테스 강 너머로 철수했다. 1271년 11월 12일, 바이바르스가 이집트에서 반격을 시작했을 때 몽골군은 이미 철수한 뒤였다.

1275년경부터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 등이 시리아 변경 지역을 여러 차례 침공하기 시작했다. 1277년 바이바르스가 사망하고 후계자 다툼이 벌어지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내분이 정리되고 칼라운이 술탄으로 즉위하면서 다시 맘루크의 침공이 재개되었다.

1280년1281년 사이, 아바카는 시리아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추진했다. 1280년 9월, 몽골군은 바그라스와 다르사크를 점령하고 10월 20일에는 알레포를 함락했다. 몽골군아크레에 사절을 보내 군사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십자군맘루크와 10년 휴전 상태였기 때문에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총대주교 대리는 도시가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예루살렘 왕이 다른 전쟁에 휘말려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키프로스의 왕 위그 3세와 트리폴리의 보에몽 7세는 군대를 동원했으나, 맘루크 군대가 이미 몽골군과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개입할 수 없었다.[22]

아바카와 아르메니아의 레오 3세는 프랑크들에게 새로운 십자군 파병을 촉구했지만, 호스피탈 기사단과 자금 부족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 1세만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23] 마르카브 요새의 호스피탈 기사단은 부카이아 지역으로 연합 습격을 감행하여 칼라운 술탄의 군대와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며[24], 1280년 10월에는 크라크 데 슈발리에까지 습격하고 1281년 2월에는 크라크의 맘루크 수비대를 격파했다.[22] 몽골군은 철수하면서 1281년 겨울에 5만 명의 기병과 5만 명의 보병을 이끌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에 대한 서방의 구체적인 호응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24]

이집트의 무슬림들은 1271년에 시작된 십자군과의 10년 휴전을 준수했다. 1281년 5월 3일, 새로운 술탄 칼라운은 아크레의 남작들과 새로운 10년 휴전을 맺었고, 1281년 7월 16일에는 트리폴리의 보에몽 7세와도 두 번째 10년 휴전을 체결했다.[25]

예고되었던 몽골의 침공은 1281년 9월에 시작되었다. 몽골군 5만 명에 더해 아르메니아인(레오 3세 지휘), 조지아인, 그리스인, 그리고 마르카브 요새에서 온 약 200명의 호스피탈 기사단 기사들이 합류했다.[26][27] 이들 기사단은 자신들이 맘루크와의 휴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28]

1281년 제2차 호무스 전투에서 몽골군의 패배(왼쪽).


1281년 10월 30일, 총 8만 명에 달하는 몽골과 그 동맹군은 호무스 근교에서 술탄 칼라운이 이끄는 맘루크 군대와 격돌했다. 그러나 이 제2차 호무스 전투에서 몽골 연합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28], 아바카의 시리아 정복 시도는 결국 좌절되었다.

2. 5. 죽음과 계승

아바카 칸은 1282년 4월 4일 하마단에서 사망했는데, 알코올성 섬망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많은 몽골 지도자들처럼 과도한 음주 습관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1285년, 그의 재무 장관이었던 샴스 앗딘 주와이니가 그를 독살했다는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29] 다른 기록에 따르면 1282년 4월 1일 모술 근교에서 사망하여 우르미아 호 동쪽 기슭의 샤후(Shahu) 지역에 있는 아버지 훌레구의 묘역에 묻혔다고도 하며, 사인은 알코올 중독으로 전해진다.

아바카 칸의 사후, 그의 미망인이었던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그녀의 아버지인 비잔틴 제국 황제 미카엘 8세는 그녀를 다른 몽골 칸에게 재혼시키려 했으나, 마리아는 이를 거절하고 수녀가 되어 1285년경 파나기아 무흘리오티사 교회를 세웠다.

아바카 칸의 뒤는 그의 동생인 테쿠데르가 이었다. 테쿠데르는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이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맘루크와 손을 잡으려 했다. 그는 아바카 칸의 친기독교 정책을 뒤집고 맘루크 술탄 칼라운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이에 칼라운은 프랑크 영토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여 1285년 북부 요새 마르가트를, 1287년 라타키아를, 1289년 트리폴리를 점령했다.[30]

그러나 테쿠데르의 정책 전환은 내부 반발을 샀다. 1284년, 아바카 칸의 아들 아르군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아르군은 삼촌 테쿠데르를 성공적으로 축출하고 처형한 뒤 스스로 일 칸의 자리에 올랐으며, 아버지 아바카 칸의 친기독교 정책으로 다시 돌아섰다.

아바카 칸의 막내아들인 가이하투는 이후 1291년에 칸위를 계승했다.[31][32][33]

3. 가족 관계

말을 탄 아바카. 그의 아들 아르군이 왕실 우산 아래에서 그의 곁에 서 있고, 그의 아들 가잔을 품에 안고 있다.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 14세기 초


아바카 칸은 여러 명의 배우자와 자녀를 두었다. 그의 부모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훌레구 칸
  • 어머니: 예순진 하툰[36] (술두스 부족 출신)


아바카 칸의 배우자와 첩은 다음과 같다. 일부는 아버지 훌레구 칸에게서 물려받았다.

이름지위/출신비고
욀제이 하툰[37]훌레구의 비아바카가 물려받아 오르도를 계승. 뭉케 테무르의 어머니.
투크타니 (토키야타이) 하툰[45]훌레구의 측실1292년 2월 20일 사망. 카툰으로 승격되어 도쿠즈 카툰의 지위를 계승.
도르지 하툰[38]대 하툰
누크단 하툰[39]술두스 부족차남 가이하투의 어머니. 도르지 하툰 사후 후임으로 오르도를 물려받음.
엘투즈미쉬 하툰[40]콩기라드 부족쿠틀루그 티무르 궤레겐의 딸. 누크단 하툰 사후 후임으로 오르도를 물려받음.
파디샤 카툰[41]케르만 통치자 쿠트 알딘 모하마드와 쿠틀루그 투르칸의 딸아바카의 생모 예순진 하툰의 오르도를 물려받음. 후에 가이하투의 비가 됨.
메르테이(밀리타이) 하툰[43]콩기라드 부족타가이 티무르의 여동생. 칠녀 노친 카툰의 어머니.
토다이(토데이) 하툰[50]콩기라드 부족장녀 율 쿠틀루그 카툰과 딸 노카이의 어머니. 후에 테쿠데르아르군의 비가 됨.
데스피나 카툰[44]동로마 제국 황녀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딸. 딸 테오도라 아라 쿠틀루그의 어머니.
불루칸 카툰[42]바야드 부족1286년 4월 20일 사망. 대 불간 하툰으로 불림. 삼녀 말리카 카툰의 어머니. 아바카에게 가장 총애받았으며, 후에 아르군의 비가 됨.
불루가친 아가치
카이트미쉬(카이미슈) 에가치[46]옹구드 부족, 첩장남 아르군의 어머니.
불루진(보울진) 에가치[48]오녀 일 쿠틀루그 카툰과 육녀 올제이타이 카툰의 어머니.
쉬린 에가치[49]
알타이 에가치
카우카비(쿄쿠테이) 에가치[47]사녀 토간추크 카툰의 어머니.



※ 이 외에도 성명이 불분명한 측실이 다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사』 「아바카 칸 기」에 따르면 아바카 칸에게는 아들 2명과 딸 7명이 있었다고 한다. 알려진 자녀는 다음과 같다.

구분이름어머니비고
장남아르군카이미슈 에가치[46]
차남가이하투노크단 하툰[39]
장녀율 쿠틀루그 카툰[51]토다이 하툰[50]엘지데이(일치다이) 쿠쉬치와 결혼.
차녀타가이(토가이) 카툰[52]불명쿤추크발의 형제 아흐마드와 결혼 후, 타타르 부족의 돌라디(드라다이) 이데치와 재혼.
삼녀말리카 카툰[53]불루칸 하툰[42]바야드 부족 노가이 야르구치의 아들 토간(토간 부카)[54]과 결혼.
사녀토간추크 카툰[55]카우카비(쿄쿠테이) 에가치[47]1291년 사망. 아르군 아가의 아들 나우루즈[56]와 결혼.
오녀일 쿠틀루그 카툰[57]보울진 에가치[48]후신 부족의 구르바타이(아라브타이) 퀴레겐과 결혼.
육녀올제이타이(올자트) 카툰[58]보울진 에가치[48]조지아의 바흐탕 2세와 결혼 후, 조지아의 다비드 8세와 재혼.
칠녀노친 카툰[59]밀리타이 하툰[43]
테오도라 아라 쿠틀루그 (비잔틴 그리스어 Θεοδώρα Ἀραχαντλούν|테오도라 아라한틀룬el)[34]데스피나 카툰[44]
노카이토다이 하툰[50]율 쿠틀루그 카툰의 동복 자매.


4. 종교 정책

아바카는 불교 신자였으나[3], 그의 종교 정책은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면모를 보였다. 그의 아버지 훌라구는 사망 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와 협상하여 황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려 했고, 이에 따라 마리아 팔레올로기나가 파견되었다.[6] 그러나 훌라구가 마리아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하면서, 그녀는 일 칸으로 즉위한 아바카와 결혼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었던 마리아는 훌라구의 아내 도쿠즈 카툰 사후 몽골 내에서 중요한 영적 인물로 여겨졌으며, "데스피나 카툰"으로 불렸다.[5]

아바카 시대에 발행된 일부 동전에는 기독교 십자가와 함께 아랍어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오직 한 분 하느님"이라는 기독교 신앙 고백 문구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8] 이는 아바카 칸 치하에서 기독교적 요소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조

[1] 간행물 "The Salghurid Coinage of Fārs (Iran) Citing the Mongols: The Varieties of Overlordships, Form and Content (623–685/1226–1286)" https://www.academia[...] 2013
[2] 서적 Nizam-e-tawareekh https://archive.org/[...] Internet Archive
[3] 웹사이트 ABAQA – Encyclopaedia Iranica http://www.iranicaon[...] 2020-04-16
[4] 논문 The Chinese-Uighur Animal Calendar in Persian Historiography of the Mongol Period https://www.jstor.or[...] 1994
[5] 서적
[6] 서적 1912
[7] 서적
[8] 서적 Histoire de l'Empire Mongol
[9] 서적 The history of Mongol conquests
[10] 서적 Mamluk-Ilkhanid war 1260-1281
[11] 서적 The history of World
[12] 서적 The Mongol Empire and its legacy
[13] 문서 Knobler
[14] 서적
[15] 서적 Mongols and the West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III
[20] 서적 Mongols and Mamluks
[21]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III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The Crusades Through Arab Eyes
[28] 서적
[29] 서적 Abaqa Encyclopædia Iranica 1983
[30] 서적
[31] 서적 Women Rulers Throughout the Ages: An Illustrated Guide https://archive.org/[...] ABC-CLIO 2012-06-23
[32] 서적 Continuity and Change in Medieval Persia: Aspects of Administrative, Economic, and Social History, 11th-14th Century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2-06-23
[33] 뉴스 Padishah Khatun (Safwat al-Din Khatun): 13th Century http://www.womeninwo[...] Women in World History 2012-06-23
[34] 서적 The Byzantine Turks, 1204-1461 2016-05-19
[35] 문서 パードシャーは後にゲイハトゥの妃となり、1292年、ゲイハトゥの命で後継問題でもめていたケルマーンに帰国。第5代当主クトルグ・テルケンを追放した弟のソユルガトミシュを捕らえて処刑し、カラヒタイ朝の第7代当主となった。
[36] 문서 ييسونجين خاتون Yīīsūnjīn Khātūn
[37] 문서 اولجاى خاتون Ūljāy Khātūn
[38] 문서 دورجى خاتون Dūrjī Khātūn
[39] 문서 نوقدان خاتون Nūqān Khātūn
[40] 문서 ايلتوزميش خاتون Īltūzmīsh Khātūn
[41] 문서 پادشاه خاتون Īltūzmīsh Khātūn
[42] 문서 بلغان خاتون Bulghān Khātūn
[43] 문서 مرتی خاتون Mirtay Khātūn
[44] 문서 دسپنه خاتون Dispina Khātūn
[45] 문서 توقتى خاتون Tūqtay Khātūn
[46] 문서 قايميش ايكاچی Qāymīsh Īkāchī
[47] 문서 كوكتی Kūktay
[48] 문서 بولچين ايكاچی Buwulchīn Īkāchī
[49] 문서 شيرين ايكاچی Qāymīsh Īkāchī
[50] 문서 تودای خاتون Tūdāy Khātūn
[51] 문서 يولقتلغ Yūl-Qutlugh
[52] 문서 تغای Taghāy/Tughāy
[53] 문서 ملكه Malik
[54] 문서 母ブルガンの伯父ノカイ・ヤルグチの息子
[55] 문서 طغانچاق Ṭughānchūq
[56] 문서 アルグンの筆頭部将で、オイラト部族出身のイラン総督アルグン・アカの息子
[57] 문서 ايلقتلغ Īl-Qutlugh
[58] 문서 اولجيتای Ūljaytāy
[59] 문서 نوچين Nūchī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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